매해 6월엔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린다. 올해도 어김없었다. 지난 6월 26일 수요일부터 일요일 30일까지 5일간. 올해는 15만 명쯤이 찾았다 한다. 한국서 열리는 최대규모의 책잔치다. 지난 2018년부터 올해까지 도서전 참관기를 뒤적여보았다.
도서전. 책방과 책의 진흥
고제홍서포 혹은 회동서관(匯東書館)을 아시는지? 1880년대말, 조선의 근대화가 선포된 갑오개혁 이전에 이 서점은 출판사요 인쇄소였다. 그곳에서 발행돼 한국서는 첫 베스트셀러(당시 10만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1909년 발행 이후 1925년 16쇄)가 된 책이 국어학자 지석영이 편찬한 자전석요(字典釋要)였다. “우리 음에 맞는 자서를 편찬”하고, 동음이의어 등을 구별해 본뜻을 찾아볼 수 있게 했다. 요즘이야 교과서와 참고서가 넘쳐나고, 스마트폰으로 ‘세상의 모든 멀티미디어 정보’까지 언제 어디서든 접속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 시작은 글을 제대로 읽고자 하는 뜻의 한자사전이었다는 것은 인상적이다.
도서전의 주인공은 책이다. 작가들과 독자들, 출판인들과 외국인들. 이 모두가 손 안에 들어가는 한 권 책을 바라고 이곳에 온다.
2018년 국제도서전은 ‘치유로서의 한국문학’ 장을 마련했다. 번역아카데미 교수와 학생들은 “힘들고 지친 우리의 삶을 치유받는 시간”으로서의 책읽기를 소개했다. 박완서 작가의 『친절한 복희씨』는 16개 언어로 번역됐다. 러시아어권 특별과정 교수 리디아 아자리나는 이 책이 모두 ‘해피엔딩’이라며, “이를 통해 작가는 삶 속에서의 따뜻한 화해를 선사한다”고 적었다. 중국어권 학생인 이시아는 천명관의 작품 『고래』가 “영화의 꿈을 가진 여자 금복이 영화관을 짓고, 코끼리를 키웠던 쌍둥이자매가 코끼리와 순진한 감정을 나누고, 벽돌을 만들 때 문 아저씨가 정성을 보여주었다면서, 우리의 삶에서 꼭 필요한 귀한 정신들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적었다. 도서전은 책들, 그러니까 책 안의 정신들과 서로의 삶을 나누는 자리다.
그래서 책은 ‘사랑’이라고 난 적겠다. 책에는 가장 좋은 것을 갈무리하고 상대에게 전하려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좋은 것이 독려되고, 권장된다. 우리 사회에도 독서와 책은 그러한 방식으로 전파되고 확산될 만한 존재라는 합의가 있다. 그것이 1954년부터 현재까지 서울국제도서전을 이어오는 이유일 것이다. 원소스 멀티유즈는 현대 문화 산업을 이끄는 큰 전략이다. 원천 소스는 단연 책이다. 책에서 발견된 괜찮은 이야기들은 뮤지컬, 연극,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플랫폼의 씨앗(이데아 혹은 아이디어)이 된다. 흰 종이에 검은 잉크로 인쇄된 글줄인 책은, 변화를 일으키는 실마리요 도화선이다. 물론 여기엔 큰 수고가 필요하다. 응원과 진흥 정책을 나라마다 펴는 이유다.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에서는 2019 서울국제도서전에 큰 부스를 만들었다. 진흥원에서 지원해 ‘이야기 활성화 사업’을 펴고, 이를 통해 만들어진 책들을 전시했다. 『조선돌싱녀』나 『맛있는 동거』처럼 주로 상업적 흥행에 이를 수 있는 ‘스토리’가 이들의 관심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의 부검 견학이나 경찰청 등의 방문도 지원했다. 창작자들이 다양한 주제로 뻗고,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는 데도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기획과 개발의 전과정에 대한 재정적-행정적 지원도 있다. 전문인력도 양성하고, 스토리유통 플랫폼도 운영한다. KOCCA의 대한민국스토리공모대전은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가장 큰 공모전이다.
배움과 질문이 삶에 파장을 일으킨다
도서전에는 콘텐츠들이 수없이 많다. 잘 섭취하면 오랜 동안 영양이 될 아주 콘텐츠들도 있다. 2022년에 만난 ‘최소 노력의 법칙’이나, ‘카피 쓰는 법’ 등이 그러한 것이었다. 이런 글들을 볼 때마다 세 개의 주머니. 빨간주머니, 노란주머니, 파란주머니가 생각난다. 위급할 때 펴보면 나를 살려줄 수 있는 그런 조언들. 책의 정신을 응축해서 담은 짧은 만화 한쪽.
문학에서 당의정(糖衣錠)은 비유다. 우리들에게 살과 피가 되는 내용과 이걸 섭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재미를 사람들은 찾아다닌다. 그러다가 의외의 내용들과도 만난다. “책은 도끼다!” 역시 비유적 선언이다. 우리가 이전에 알고, 믿고, 행하고 있던 것들을 되돌아볼 기회를, 책이 제공한다.
김영선이 지은 책은 『존버씨의 죽음』이다. 존버는, 이외수 작가의 뜻풀이로 하면, ‘존나게 버텨’다. 책의 부제는 ‘갈아넣고 쥐어짜고 태우는 일터는 어떻게 사회적 살인의 장소가 되는가’이다. 알렉산드리아 J. 래브넬의 책 『공유경제는 공유하지 않는다』는 ‘긱이코노미의 민낯과 무너지는 플랫폼 노동자’로 부제를 달았다. 『사람입니다, 고객님』은 문화인류학자 김관욱이 아닐지라도 눈치챌 만한 시대의 변화를 담았다. 구로공단 ‘공순이’들은 ‘콜순이’들이 되었다. 내 친구는 이마트 식품판매부에서 일한다. 그녀는 매일매일 계약을 새로 한다고 말했다. 퇴직금도 4대보험도 없이, 그나마도 임금을 적게 주려는 설계다. 실제 있을 것 같지 않은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는 세상을 증언해 주는 책들도 우리는 만난다. 우리의 일이 이렇게 불행할 필요가 있을까? 이것은 모르텐 알베크의 책 『삶으로서의 일』에서 담고 있는 묵직한 질문이다.
2018년 도서전에서 ‘소개, 계몽, 증언의 매체로서의 만화’를 접했었다. “다큐 및 교육적 내용의 프로젝트가 늘어난다”는 내용이었다. 정신질환자, 소수자, 사회적 낙오자, 위험에 노출된 보육원 아이들, 20세기의 급변하는 역사적 증언”을 담은 내용들이 보다 친근하게, 쉽게 대중에 다가간다. 만화라는 매체의 힘이다.
만화는 제 9의 예술이다. 거기엔 글과 그림이 있다. 이야기를 만들고, 장식을 한다. 텍스트와 이미지는 협력하여 큰 시너지를 낸다. 만화엔 주인공의 모습과 표정과 옷차림이 정해진다. 배경과 상황과 도구들 역시 창작돼 있다. 그러니 만화는 다른 여타의 매체들 안에서 쉽게 현실화될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 연극이나 뮤지컬까지도. 도서전에선 우리에게 흔하지 않는 그래픽노블을 만난다. 아버지를 잃었을 때, 도서전서 만난 책이 우리나비의 만화 『내 아버지의 집』이었다. 그 책으로 인해 나는 큰 위로를 받았다.
친구도 작가도 만나 새 전망과 힘 충전한다
해마다 가족들이 함께 서울국제도서전을 찾는다. 들어가면 제각기 흩어져 자신의 책들로 다가선다. 2024년 올해 아들은 『돈키호테』를 샀다. 요즘 재미나게 읽고있는 책이라며. 익숙했던 책만 아니라 사람들도 보게 되는 곳이 여기다. 2023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는 ‘옛친구’를 만났다. 성수동 연무장길에서 물리적 자리를 틀었던 안전가옥. 이제 자리를 옮기고, 출판사가 돼 수많은 책들을 발간해냈다. 2010년 후반기, 안전가옥은 매혹적인 책들을 보고 만질 수 있는 도서관을 운영하고, 카페를 만들고, 창작의 공간을 주고, 초짜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독려하고 있었다. 그 역할들이 지속되어 이렇게 창작되는 책들을 보자니, 그라포마니아-책을 만들려는 의지-의 현실, 증거와 만난 참이었다.
달걀로만 두 권의 요리책을 내고 싶다고 말한 것은 『Mastering the Art of French Cooking』을 쓴 줄리아 차일드였다. 출판사는 ‘스무 권짜리가 될 뻔한 책을 단 한 권에’ 묶어냈다. 솎고 재구성하고, 다시 쓰는 작업을 작가도, 출판사도 한다.
사람들은 ‘결과’ 그 자체보다 ‘과정’이 어떠했는지에도 관심이 크다. 그러한 이야기들, 다 못다한 말들이 강연이나 기타 홍보물에서 펼쳐진다. 이런 도서전이 아니라면 접하기 어려운 내용들이어서, 많은 이들이 굳이 도서전을 찾는다.
유튜브를 통해서만 만났던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코너를 만나고, 옥수동서 자리를 틀었다가 성수동으로 이사왔다가 헤어졌던 <목수책방>도 만났다. 우리동네 <책읽는엄마 책읽는아이>에서 강사로 모셨던 이루리 편집장도 2023년 도서전서 보았다. 이번엔 자신의 책도 냈다. 그 책 『웃기거나 찡하거나』를 샀다. 2018년 만난 <증언으로서의 만화> 실체를 2023년에 만났다. 한국작가 박건웅은 우리나비에서 팬사인회를 해주었다. 그는 민간인 학살, 잊혀진 음악가 옌안송(정일성), 독립운동가 양우조-최선화 부부의 육아일기 『제시이야기』도 먹선으로만 그려낸 책을 내놓았다. 몇 년 전 농사를 지었던 고양의 우보농장도 봤다. 이렇게 꾸준히 작품을 내는 작가야말로 이 모든 도서전의 주인공이랄 만하다. 2024년 이다빈 작가는 『소설로 떠나는 다크투어』의 연장선인 책을 냈다. 도시기획 공무원이었던 김홍렬 작가와 편집인으로 만나 『용산미군기지와 도시산책』이 그것이다. 그들은 현장에서, 도서전에서 사람들과 만난다.
책, 작가, 독자, 삶은 모두 연결돼 있다
김훈 작가가 대학에서 영문과를 다니며 본 글 중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이 안중근의 『신문조서』와 이순신의 『난중일기』라 했다. 그때의 글들이 그의 책 『칼의 노래』와 『하얼빈』이 되었다. 어제의 글과 오늘의 삶은 내일의 책이 된다. 이 일은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다.
2025년의 도서전을 기다리기엔, 너무 길다. 어쩌나? 다행히 우리 곁에는 적지 않은 수의 도서관들과 책방들이 있다. 최근 문을 연 송정동 늘푸른도서관에선 중랑천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멀리 수락산까지 장쾌한 풍경을 만난다. 문 앞에서 그림책 원화 전시가 펼쳐진다. 성동구립매봉산숲속도서관에서는 책을 보다 고개를 들면 숲이 보인다. 그곳 가까이 사는 친구를 거기서 봤다. 『아름다운 비행체 잠자리』를 만난 곳도 거기다. 성동 곳곳에 금호에, 왕십리에, 성수동에, 마장동 청계에, 용답동에 공공도서관들과 사립도서관들이 있다. 책방도 제역할들을 꾸준히 하고 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소소하게 소박하게 모여 무엇이든 하고 있다. 이번 여름엔 도서관에 가자. 다음 여름에 서울국제도서전에 갈 즐거운 상상도 해보자. 책을 펼치면 만날 신세계를 같이 설레여 했으면 한다. 직접 작가가 될 꿈, 평론가가 되어 토론도 할 계획도 세워보면 신나겠다. 그런 꿈 아니어도 손에 손잡고 길에 나서시라. 우리 곁에는 늘 책과 책방과 도서관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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