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동에서 독립선언할래요.

그이름 작전 '소소소'

소금처럼 귀한 사람들

소중한 영혼들이 수감된 곳

소소하지만 가슴 울리는 사연

안녕하세요! 골목여행도슨트이자 동화작가를 꿈꾸는 지망생 윤기경입니다.

오늘은 제가 가장 애정하는 마을을 소개할까 하는데 어떠십니끼?

흠! 괜찮다고 답하셨으니, 그냥 가겠습니다. 하하!

혹시, 여러분은 서울에 천연동이라는 동네가 있다는 걸 알고 계신가요?

독립공원이 위치한 마을이라고 하면 더 나을듯 합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 마을로 침투해 보겠습니다.

일명 소소 소하고 비밀스러운 작전에 여러분을 초대한 것이죠.

어떤 작전이든 일단 이유가 있어야 하겠죠!

어린 시절 사학자가 되고 싶었던 저는 홍범도 장군을 사랑하게 되었죠.

안중근 의사를 흠모했고, 유관순 열사를 생각하며 코끝이 아려 왔습니다.

그분들의 고귀한 넋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듯한 독립공원에서부터 작전을 시작합니다. ​

이진아기념도서관에서 나와 멀리 바라보니,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입니다

“오늘 해보자!”

그동안 둔했던 움직임을 털고 미루었던 소소 소 비밀작전을 드디어 시행하기로 했죠. 독립공원 뒷길을 따라 들어서자, 여행이 좀 더 은밀해졌습니다.

눈여겨 보지 않았서 몰랐던 곳을 보면서 비로소 질문을 던졌죠.

“독립이란 것이 왜 이리 낯설지요?”

버스를 타고 아니면 생각 없이 걷다가 아무렇지 않게 지쳐 지나가던 동네.

먼저 독립공원 후방에 위치한 이진아기념도서관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두었던 몇몇 곳을 비밀스럽게 돌아 보겠습니다.

“조용히 따라오세요.”

➊ 비극의 운명이 만든 희망의 메시지 ‘이진아기념도서관’

책을 사랑했던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학교를 졸업하고 좀 더 공부하려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하지만 이런 운명의 장난이 있을까. 그녀는 그곳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고인이 되고 말았다.

당시 유가족의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 딸을 생각하며 슬픔을 꿈으로 승화시켰다.

유가족은 사재를 털어 2005년 9월에 서대문독립공원 근처에 도서관을 설립하고 또다른 아들 딸들을 위해 도서관 일체를 사회에 희사했다.

이진아기념도서관입니다이진아님을 잊지 않겠습니다통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볕이 따뜻한 도서관입니다

이진아(2003년 당시 23세) 님의 이야기가 있는 아름다운 도서관입니다.

도서관 앞 작은 공원과 넓은 통창이 있는 도서관이 조화로워 보입니다.

서대문형무소와 역사관 담장 사잇길을 걸어 올라가면, 고즈넉한 공원이 보인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데도 이진아기념도서관 앞 소공원이다.

하지만, 역사관은 알아도 도서관의 존재는 모르는 이가 많다.

작은 공원을 가로질러 차분한 얼굴을 한 도서관에 들어가 보자.

1층 현관에 들어서면 가녀린 여인의 초상이 반긴다.

그녀가 바로 이진아 님이다.

그녀의 꿈이 모두를 위한 꿈이 된 곳 이진아기념도서관.

설립의 배경을 알게 된 후에 도서관의 모든 것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각 층을 연결하는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건물의 중심에서 각 층을 개방적으로 연결하고 있었다.

높고 큰 통창으로 들어오는 햇볕 조명은 훈훈해 보였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열람실의 밝음과 아늑함은 단연 최고 수준으로 보입니다.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도서관으로 어린이열람실, 모자열람실, 전자정보열람실, 종합자료실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여러 문화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 운영 시간: 09:00-20:00(매주 토·일 17:00까지) (매주 월요일 휴무)

❷ 미루나무가 견뎠던 195개의 슬픔

다시 고개를 돌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발길을 옮기자, 마음이 숙연해졌다.

내가 즐겨 다녔던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전경이 한눈에 펼쳐졌다.

여기 한 젊은이가 미루나무 앞에 서서 목이 메도록 울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순간은 오로지 어둠투성이였다.

일제의 총칼과 압박만이 존재했으며, 마지막 사형장으로 향할 즈음에도 그의 부모와 형제들도 끊임없이 고통의 날들을 보내야 했다.

독립을 외쳤던 청년은 이제 미루나무 앞에 섰다.

어머니에게 매달리듯 울고 싶었던 청년의 입술은 가녀리게 떨고 있었다.

어찌 죽음이 무섭지 않겠는가.

어찌 부모형제가 그립지 않겠는가.

잠시 후면 그는 사형대의 이슬이 될 것이고, 그 시신은 좁고 어두운 시구문을 통해 인생의 마지막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인데 말이다.

숭고한 님들을 배웅하던 통곡의 미루나무

나의 영웅들이 선택한 고통의 사형장

우리 소중한 얼이 서린 시구문 앞에서

사형장과 시구문 앞에 서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사진도 흔들립니다. 발길을 쉽사리 옮길 수 없었습니다.

오래전에 쓰러진 미루나무를 치우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뒷마당에는 여전히 미루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한 젊은이, 아니 수많은 젊고, 늙고, 어렸던 순국열사들의 마지막을 함께 한 미루나무는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이제 모로 누워버렸다.

하지만 죽음으로 증언했던 독립의 열망이 대를 이어 결국 해방을 이루었듯, 미루나무는 슬픔과 위로의 후계 나무를 세웠다.

좁디좁은 감옥에 있었던 고귀한 영혼들

사형장 뒤 통로로 빠져나왔을 나의 님들이여

이진아기념도서관에서 내려오면 그들이 마지막 여행을 떠났던 시구문을 지나 미루나무 앞에 잠시 발걸음을 멈춰 보자.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분들은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다.

유관순 선생님이 이곳에서 순국하셨고, 강우규 의사님도 여기서 안타깝게도 쓰러지셨다.

당시 총독부 관보에 따르면 1922년부터 1945년까지 처형자는 총 195명에 이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중 독립 유공자로 서훈된 인물은 18명에 불과하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아니 개탄스럽고 한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저분들의 명예를 온전하게 되찾을 날이 오리라 믿으면서.

그날이 진정 우리가 나라를 찾았음이라 확신하면서.

시인이 생각났습니다. 그도 통분을 참지 못했으리라.

그래서 오늘은 그의 시 한 편을 떠올려 봅니다.

벌 / 김광섭

​나는 2223번

죄인의 옷을 걸치고

가슴에 패를 차고

이름 높은 서대문 형무소

제3동 62호실

북편 독방에 홀로 앉아

“네가 광섭이냐”고

혼잣말로 물어보았다

​3년 하고도 8개월

1300여 일

그 어느 하루도 빠짐없이

나는 시간을 헤이고 손꼽으면서

똥통과 세수 대야와 걸레

젓가락과 양재기로 더불어

추기 나는 어두운 방

널판 위에서 살아 왔다

여름이 길고 날이 무더우면

나는 바다를 부르고 산을 그리며

파김치같이 추근한 마음

지치고 울분한 한숨에

불을 지르고 나도 타고 싶었다

겨울 긴긴 밤 추위에 몰려

등이 시리고 허리가 꼬부라지면

나는 슬픔보다도 주림보다도

뒷머리칼이 하나씩 하나씩

서리같이 세어짐을 느꼈다

나는 지금 광섭이로 살고 있으나

나는 지금 잃은 것도 모르고

나는 지금 얻은 것도 모르고 살 뿐이다

그러나 푸른 하늘 아래로 거닐다가도

아지 못할 어이 문득 달려들어

내게는 이보다도 더 암담한 일은 없다

그리하여 어느덧 눈시울이 추근해지면

어디서 오는 눈물인지는 몰라도

나의 눈물은 이제 드디어

사랑보다도 운명에 속하게 되었다

인권이 유린되고 자유가 처벌된

이 어둠의 보상으로

일본아 너는 물러갔느냐

나는 너의 나라를 주어도 싫다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시인생각, 2013, 44~46쪽

독립운동가들이 마지막 순간에도 조국을 애타게 부르짖었을 사형대가 보입니다

​나는 너의 나라를 주어도 싫다! 하셨던 김광섭 시인의 소리 없는 눈물이 차가운 아스팔트로 떨어졌을 것 같습니다.

#「성북동 비둘기」로 유명한 김광섭 시인은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33년 귀국해서 모교 영어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1941년 학생들에게 반일 민족사상을 고취했다는 제목으로 구속되어 3년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❸ 또 하나의 위대한 독림운동 성지 ‘옥바라지 골목’

독립공원 반경 1km 내에 자리한 마을은 대부분 천연동 관할에 있다.

특히, 이 일대는 일명 ‘옥바라지 마을’이라고 불렸을 만큼 특별한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살기도 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만, 그 시절의 모습이 모두 사라져 아쉬운 생각만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비밀작전을 꾸민 덕에 옥바라지 골목 마을의 옛 모습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했다.

집집마다 오랜 사연이 먼지처럼 쌓인 슬레이트 지붕과 돌담이 엉켜있는 마을.

그 분위기로도 아픈 시대를 딛고 아직 남아있는 옥바라지 골목 마을처럼 보였다.

아직 남아있는 자취

그옛날 마을 풍경을 닮은 듯


물론, 옥바라지 마을이라는 슬픈 역사를 이겨내고 천연동이 살기 좋은 동네로 바뀌고 있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다행스러운 일은 인근에 옛 옥바라지 골목의 역사자료를 전시하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작은 집’이 그곳이다.

천연동을 가로질러 산으로 오르자, 한눈에 보이는 사뭇 옛 풍경이 옥바라지 골목 마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람 따라 아련한 기억으로 남길 생각입니다.

서대문독립공원 인근, 지금은 높은 고층 아파트 숲이 들어섰지만, 이곳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이 옥바라지를 위해 머무른 ‘옥바라지 마을’이 형성된 곳이다.

최근에, 이 지역이 재개발로 추진되면서 옥바라지 마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다행히, 나는 지인이 알려준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작은 집’이라는 역사기념관을 방문하게 됐다. 소규모 역사관이지만, 소중한 옥바라지 마을의 자료가 전시돼 있어 고마웠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3번 출구 앞에 위치한 아담한 한옥 건물이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운동가는 일제강점기의 악랄한 고문의 집중 대상이 되었다.

그 가족들의 옥바라지는 독립운동가의 투쟁만큼이나 힘들었지만, 그들은 사양하지 않았다. 역시 독립운동의 고귀한 핏줄이자, 우리 고귀하고 숭고한 얼이다.

독립투사들의 혹독한 수감 생활이 계속되면 될수록 그 가족들은 더욱더 자주 면회했다.

떡을 짖고 솜바지를 만들어 수감된 아버지 또는 어머니, 혹은 아들이거나 딸들을 위해 희생을 감수했다.

그들은 독립운동의 조력자이자, 끝내 그들의 시신을 마주하고서야 모든 걸 내려놓았을 것이다.

아니다, 오히려 더욱더 일제에 저항했을 것이다. 그들은 또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가 되었고 그래서 오늘날의 조국을 만들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와 그 소중한 가족을 기억하는
옥바라지 골목은 제2의 독립운동 성지
옥바라지 골목 마을 풍경


옥바라지 길목에 모여 살던 사람들은 독립운동의 조력자이자, 일제에 말없이 저항했던 또 하나 둘 그리고 모두의 독립투사였습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이 저항할 수 있었고 오늘날의 조국을 만든 것입니다.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작은 집’에 들어서자,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되고 말았다. 가장 먼저 우리를 맞는 건 옥바라지하는 가족들의 편지와 면회에 관한 전시물이었다.

하지만, 면회는 두 달에 한 번 5분 정도의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면회할 수 있었다.

벽에 난 50cm의 구멍으로 서로의 얼굴만 볼 수 있었지만, 가족들에게는 그나마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편지는 두 달에 단 1통, 검열을 통과한 편지만을 보내거나 받을 수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이 그 가족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전시되어 있는데, 힘든 수감 생활을 유추할 수 있어 마음이 저렸다.

박명화와 남편 오세창, 주옥경과 남편 손병희 등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독립운동가를 옥바라지한 가족들의 이야기와 사연을 영상으로도 만나볼 수 있었다.

서대문형무소 수감자의 여름용, 겨울용 수인복이나 세탁 등은 옥바라지하는 가족들이 직접 수선하여 넣어줘야 했다.

옥바라지 마을이 위치했던 곳의 풍경을 보여주는 사진과 영상,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흔적을 되새겨 보는 전시물도 다양했다. 골목은 지게꾼, 땜장이, 물지게꾼, 굴뚝장이, 대장장이 등 마을 사람들의 삶은 매우 거칠어 보였지만, 정감 있어 보였다.

유관순 선생님의 숭고한 동상의 발입니다


유관순 선생님..

그녀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영원한 자랑입니다.

옥바라지도 받지 못하고 어리신 몸으로 쓰러지신 선생님을 기억합니다.

더 먼 날 선생님께서 맨발이 되셨던 이유를 모두 가슴 아프게 받아주길 기원하며. .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는 바로 이 옥바라지 마을이 등장한다.

시간을 내어 이곳에 들러 보세요. 우리가 모르는 옛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어요. 그들의 고된 하루에 감명받을지도 모르죠.

생각하는 작은 집을 빠져나오는데, 허허로운 사랑채 모습이 괜스레 아쉽습니다.

좀 더 욕심을 냈다면, 더 많은 자료가 큰 공간에 자리했었을 텐데.......

여러분,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너무 가슴 아픈 사연이 많아서 마음이 쓰라리거든요,

비밀작전은 계속될 겁니다.

소금처럼 귀한 영혼이 소중한 정신을 남긴 여기서

소소하게 작전을 이어 나가겠습니다.